내인생의 7부능선
인생의 7부 능선에서 !!
산에 오르다보면 정상 밑에서 잠시쉬어 흐르는 땀을 닦고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야! 벌써 여기까지 왔네, 경치 참 좋다! 올라올 때는 경황이 없어 못 보았는데 지금 보니 너무 좋다!
저기 바위 오를 때는 조마조마 했어 다음에 올 때에는 우회해서 와야겠어,
저 오솔길 지날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았어, 저런 길만 계속 걸으면 피곤하지도 않을 거야
이런 생각들을 하며 또 가던 길을 걷는다.
오늘이 음력 정월 스무하루 바로 육십 회 내 생일이다.
사람 수명이 이제는 많이 늘어나 90세까지는 예사로 산다니까
90세사는 것으로 계산할 때 60세면 3/2를 산 셈이다.
벌써 육십이라니, 세월의 무상함도 느낄 사이 없이 여기까지 달려왔다.
내 육십의 전반기 30년은 시골 고향에서 살았고 나머지 반은 서울에서 살았다 .
날짜로 계산해보았더니 21.535 일이다 별것도 아닌데 꽤 오래 산 것 같다.
인생의 7부 능선, 이쯤해서 지나온 내 과거를 음미도 해보고 반추(反芻)도 해보려고 한다.
나는 충청도 서천의 두메산골에서 나서 자랐다 7남매의 맨 꼴 지로 태어났지만,
귀여움 만큼은 독차지하며 자랐다 시골에서는 제법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덕에 내가 태어난 시절이
전쟁 때이고 학교 입학할 때가 전쟁직후여서 다른 친구들은 꽁 보리밥에 초근 목피 로 연명 하였다는데
나는 다 나처럼 쌀 밥 먹고 사는 줄 알았다 제법 컸을 때 까지 ,
내 나이 세 살 때 못하는 말이 없었고 그때부터 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웠다 그리고
6세 때에는 천자문을 줄줄 외웠었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현(玄)누를황(黃)을 천지현황 ,우주홍황 일월영측, 진숙열장 이라고 하는 것을
부친다고 한다.
호봉팔현(戶封八縣)이 절반이고 언재호야(焉哉乎也)가 끝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외울 수가 있다 그때 기억으로, 그러는 나보고 우리 집에서는 싹수가 있다고
좋아하셨을 테지만, 사실 나는 한 글자도 몰랐다 지금 천자문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내가 배운
천자문은 글자 주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 그걸 보고 건성으로 읽은 것 같다.
일곱 살 먹어 초등학교 에 입학했다 그 당시에는 열 살, 열한 살 먹어 입학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일곱 살에 입학했으니 매일 큰 애들한테 맞고 다니고 공부 또한 시원찮아 후미에서 뱅뱅 돌았다.
중간에 공부로 정진하려고 노력도 해보고 다짐도 해보았는데 그게 기초도 없고
우리 부모님이 공부해라 말 한마디 없었고 그뿐만 아니라 당시 참고서인 전과나 수련장(문제집)을
단 한권 사주신적이 없었다, 나를 농사꾼을 만드실 요량이셨던 게다.
지금은 농사지으려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당시에는 덧셈 뺄셈이나 하고 글씨나 읽으면 되었다
오히려 많이 배우면 객지로 도망(?) 간다고 꺼렸다.
그렇게 초등하교 6년을 마쳤고 중학교도 안 보내주시겠다 는 것을 서천 매형이 마침 오셔서
요즘 중학교 안가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날 데리고 후기로 뽑는 학교 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날 매형 집에 머물며 학교에 다니게 했다 .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몸도 아프고 공부도 하기 싫고 하여 3개월 정도 학교를 안 갔다
그때 나를 교회로 인도하신 송영은 목사님을 만났다 .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붙들린바 되었다.
3개월쯤 쉬었더니 학교에서 친구들이 과자를 한보따리 사가지고 문병을 왔다 10km가넘는 먼 길인데도,
친구들에 고맙고, 또 서천 매형이 나서서 강권하고 하여 학교에 나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부터 중간고사 시험이 있었다 .
알아야 면장을 하던 하지 그냥 찍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명을 뒤로하고 꼴찌 앞에 내가 섰다.
졸업장은 주어서 타다 놓았는데 문제는 아버지 가 신학문 배워야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
차라리 한학을 공부해라 하는 감언이설(?) 에 그만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 입장은 그랬다
위로 형님이 있지만 두 분다, 대학 공부시켜봤더니 집에 안 붙어있고 하나 남은 막내를 가업인
농사꾼을 만드실 요량이셨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 뜻대로 아버지를 따라 한 4km 떨어진 성암정사 라는 서당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었다
우리 사부이신 정 선생님은 한학에 관한한 끝을 모를 정도로 학식이 깊으셨다.
학동은 15~6명 정도 되었다 서당에 가면 가는 즉시 선생님에게 큰절을 해야 한다.
그리고 글을 배우고 글을 큰 소리로 읽고 한 사람씩 신문지 반장에 체 줄이라는 붓글씨를 써주시면
그걸 보고 따라 쓴다, 그리고 또 읽고 쓰고 점심은 도시락을 싸 가면 사모님께서 데워주신다
밥 먹고 좀 쉬다가 읽고 쓰고 그러다 석양이 뉘엿뉘엿 하면 선생님께 큰 절 을하고 돌아온다.
일요일만 쉬고 주 6일을 다녔다 그러고도 글 세(수강료)는 쌀 한말 이였던 것 같다
일 년을 꼬박 다녔는데 천자문, 계몽 편, 명심보감, 소학상권, 소학하권까지,
다음에 사서오경 인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예기 춘추 주역 이렇게 배울 판인데
날 주님 전으로 인도하신 송 목사님께서, 요즘 구학문 배워서 어디 쓸거니하시며,
학교를 가라고 몇 번을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그만 접고 말았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일 년이지만 서당에서 한문 배운 것이 내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
얼마나 요긴하게 써먹는지 모른다! 피와 살같이 중요한 것이 한문이다 .
어느 날 선생님께서 주소를 초서(楚書) 로 써주시며 한번 써보라고 하셨다 나는 열심히 그렸고,
나중에 선생님이 보시고는 “필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굉장한 악필 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는 희망이란 것을 갖았었다.
그 희망으로 인하여 후에 제법 쓴다는 칭찬까지 듣게 된 것 같다.
책을 다 떼면 책거리라 해서 떡을 해 와서 나눠먹고 했는데 한번은 우리 어머니가 인절미 한말을 해서
이고 오셨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 에서 학생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귀엽게 생겼고 예쁘장한 소녀가 한사람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이었다 .
옆집 형한테 물어보니 할머니 댁에 다니러 온 소녀란다 그녀가 나중에는 할머니 댁에서 눌러앉아 지내었다 자연 교회에서 자주보고 고2때는 같은자리에서 세례도 받았다. 세례동기이다.
그녀와 몇 년 후에는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로 발전한다.
교회당을 연애당 이라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의 연애소문이 온 교회뿐 아니라 동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니 한번은 목사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신다. 김 선생 어떡할 거야?
(당시 내가 주일학교 반사를 했기 때문에 김선생이라 불렀다) 목사님은 불안한 모습으로 내 눈치만 보셨는데 내 대답이 “결혼 할 거예요” 하니
밝게 웃으시며 그래 잘 되었어 하시면서 안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1966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고2때 세례를 받고 여름부터 주일학교
보조반사를 했다 그로부터 13년간 반사일은 계속 되고 뒤에2년은 부장까지 했다
성가대도 역시 같은 연한으로 봉사했고 그밖에 많은 봉사를 지금까지 이어왔다 .
아이들 둘을 시골에서 낳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서울로 이사를 왔다
이사 오는 날, 미리부터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다고 안타까워하시던 목사님께서 오셔서 너무 서운하시다고 이삿짐 차에 타시고는 서천에서 대천까지 따라오셨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만 30년이 되었다.
시골생활은 정말 어렵다 지금은 기계화가 되어 요령만 있으면 할 수 있겠지만 전에는 힘이 많이 필요했다
그 중에서도 지게질은 정말 힘들다 여렸을 때부터 단련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나는 정말 어려웠다
그것은 힘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었다, 힘이라면 지금도 좋지만 그때야 더 좋았겠지 한번은 심심해서 동네 형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마른 삭정가지를 한 지게 보기 좋게 해 놓고 짊어지려니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을 버리고 오려고 했더니 같이 간 형이 집까지 대신 져다 주었다
그 형은 체구도 나보다 훨씬 작은데도 ,
그러니 시골 농사일이 순조로울 리 없잖은가 동네일손이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도 나보고
일 좀 해달라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농사일이 너무 어려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 년 탈상을 한 후 정든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