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bakking 2019. 4. 14. 22:03

 

희년 기념예배

7월17일 이면 우리 교회가 50주년 맞는 기념일이다.

1966년도 창립예배를 드린 후 꼭 반세기를 맞는 뜻 깊은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교회에서는 그동안 발자취를 더듬는 사진전도 열고 , 기념식수에 기념비를 세우고

특별 음악회까지 계획 중이며 전날은 장로 두 명과 네 명의 권사를 뽑고 원로 장로를 추대하는 행사를 갖는다.

우리 교회 50년을 생각할 때 나한테도 같은 50년이란 또 하나의 뜻 깊은 역사가 존재한다.

내가 교회 나간 지 올해로 만 50년이 되는 해 이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해 이웃마을 교회에 부임해 오신 목사님의 반 강제적 인도로 나가기 시작했던

교회 생활이 벌써 50년을 맞았다.

지나간 50년을 반추해보면 나와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걸어온 50년을 한 번도 쉬거나 낙오 없이 꾸준하게 걸어왔다.

교회에서 의 각종 봉사나 섬김도 남에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했다. 교회에서 하는 일도 안 해본 것 없이

다 했다, 장로일이나 안 해보았고 나머지는 다 해보았다.

그런데 그 장로직분을 이번 창립50주년 행사에 내가 피택되어 임직 식을 하게 된 것이다.

임직 식을 앞에 두고 나는 기쁘거나 설렘이 전혀 없다.

남들도 다 하는 직분이고 또 오래 다니다 보면 거의 모두가 장로라는 직분을 맞는다.

나는 안수 집사를 만 20년이나 했다. 흔히 정 코스를 밟으면 안수집사 5년이면 장로가 거의 되곤 한다.

나도 사건만 없었다면 아마 늦어도 10년 전 쯤에는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장립하게 된 것은 내가 많이 부족하기에 연단하고 수련하라는

주님의 뜻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나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섭섭했고 또 분개한때도 있었다.

장로 하고 싶은 의욕이 없었는데도 타의에 의해서 경원시되고 훼방당할 때는 오기가 발동 되에

맞서 싸우고 싶은 의욕도 일었다.

이번 투표 때도 그 세력들은 나를 반대함은 물론 조직적인 반대 운동을 벌렸었다.

그 결과 같이 당선된 안집사님과 표차이가 20여 표나 밀리었고 겨우 3/2에 두 표를 넘는 초라한 당선이었다.

안집사님은 물론 훌륭한 분이다.

나보다 나이는 7살 정도 어리지만 그분도 40에 안수 집사가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착실한 신앙생활을 한분이다 .

지금 교회 안에서도 여러 분야에 충성하는 일군이다.

우리 교회 오신지는 약 10년 정도 된 분이다.

그래도 그렇지 안집사님한테 20여 표나 밀리고 보니 그 당시 참담함이란 생불여사(生不如死) =

((살아있으나 죽는 것보다 못한 비참함)) 란 표현이 적절했다.

이것은 내 자존심의 발로 라 해도 좋고 교만함의 극치라 해도 좋다. 나는 그 장로라는 것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사퇴한다고 말씀드렸더니 펄쩍 뛰시며 3/2 득표하기도 어려워 안 되는 사람도 많은데

나한테 자중하고 경거망동을 말란 뜻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다음 주까지 한 주간을 괴로움 속에 보냈다.

그런데 하루하루를 지남에 따라 점점 분함이 사그라지고 화가 옅어졌다.

찌그러졌던 나의 인상도 점점 펴지고 축하한다는 인사에 전혀 응대하지 않던 내가 웃음으로 대하며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노회에서 행하는 장로고시도 보았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임직자 교육도 마쳤다,

이제 며칠 후 있을 임직 식만 남았다.

막상 날자가 다가옴에 따라 이제 걱정이 앞선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온통 나무람인데, (내가 사실 장로 공격의 선봉이었음)

이제 내가 나무 위 참새 꼴이 될 텐데, 그래서 걱정이다.

기도로서 지혜를 구하고 겸손함으로 성도들 속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이제 재깍재깍 그 시간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