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유전(流轉)
우리 고향은 대전 조폐공사 공장이다.
시끄런 기계 돌아가는 소리 사이에서 우린 태어났다.
남들은 우릴 돈이라 부르지만 우린 형제라 부른다.
야간열차를 타고 캄캄한 상자 속에 담겨 우린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십 여일 같이 생활하다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형제는 살아서 또 만나자고, 부디 오래 살라고 서로에게 축복을 하고 재회를 다짐하면서 헤어졌다.
혹자는 우리가 있는 곳 에 악취가 진동하고, 폭력이 난무하며,
부정과 부패가 만연 하는 부정적인 면만을 기억하지만,
사랑과 평화가 있고 인정과 기쁨이 활짝 웃음 짓는 좋은 장면도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제 1 화 장례식장)
내가 처음 찾아간 곳 은 장례식장이다.
아까부터 어떤 여인이 빈소에 홀로 앉아 영정사진을 보며 울고 있다.
“엄마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그곳에서는 건강 하셔야 되요”
내가 보니까 이 노인의 자제는 4남매로 되어 있는데 빈소를 거의 혼자 지키는 이는 이 여인 뿐이다.
이 여인의 이름은 박 정자 50세 이다.
위로 언니 한명과 오빠 둘이 있다.
박정자의 집은 충청도 어느 시골로 큰 부자는 아니었어도 논이 20여마지기에 텃밭이 딸린 집이 있고
텃밭은 2단보 쯤 되었다. (1단보 =300평)
큰아들 일남은 장남 이라고 해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처음 태어났고 집안의 기둥이라 해서 온갖 불편함 없이 입히고 가르치고 대학까지 들어가게 되는데
시골살림에 형편이 어려워 논을 한자리 두 자리 팔아 졸업까지 시켰다.
그 바람에 좋은 회사에 취직이 되어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하게 되고 이제는 전무까지 오르게 되었다.
둘째아들 이남은 형한테 치여 공부도 썩 잘하지 못하니 대학갈 엄두도 못 내었고 또 설사 잘했다 해도
둘째까지 가르칠 형편도 못 되었다.
셋째 정옥은 성격이 강하고 고집이 세었다.
학교 안 보내주면 죽을 듯이 덤벼들어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여상까지는 졸업을 시켰다.
막내 정자는 마음이 비단결 같아 부모님 말이라면 늘 순종하고 시키는 일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집안이 어렵고 오빠를 가르쳐야하니 너는 상급학교를 포기 하라는 부모님 말씀도
순순히 따라 간신히 중학교만 졸업했다.
4남매는 모두 세 살 터울이다.
아버지는 큰아들 일남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일남은 대학 졸업하고 취직이 되어 고향을 찾을 때 처녀를 한명 데리고 왔다 .
엄마와 가족들에게 결혼할 여자라 소개 했는데, 엄마는 아들 결혼 앞두고 아들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얼마 안남은 논을 팔아 일남이 살 전셋집을 얻어 주었다.
둘째 이남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스스로 알아서 서울에가 어느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셋째 정옥이는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갔다 은행에서 근무 하던 중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이제 4남매 중 집에 남아 있는 자식은 막내 정자다,
정자는 엄마를 극진히 모시고 효도를 다한다.
그런 모습을 좋게 여긴 이웃동네 영감이 며느리를 삼겠다고 청혼을 하는데 정자는 어머니를 계속
모시는 조건이면 하겠다는 단서를 달아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옛말에도 굽은 소나무가 동네를 지킨다 했던가? 못 배우고 제일 용해터진 정자가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큰오빠를 가르치기 위해 모든 전답을 팔았고 이제 남은 것은 집터와 채전 밭 한 뙤기만 남아
지금 정자가 살고 있다.
값으로 치면 야 시골 땅값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일단보도 안 되는 조그마한 땅인 것을
그래도 형제간에는 부모님 유산을 받은 사람은 정자뿐이라는 시샘인지 종애를 골리는 것인지의 말들을 한다.
그러나 저러나 정자는 열심히 할 일을 하며 어머니 모시는 일에 소흘함 이 없다.
정자 어머니는 7십이 가까워 오자 온갖 병치레를 다했다.
다리가 아프다하면 울타리 밑을 다 뒤져서 우술 뿌리를 찾아 캐어내 삶아 드리고 찧어 바르고,
기침 할 때는 기관지에 좋다는 도라지를 캐다 다려드리고,
삭신이 아프다 하시면 저녁 늦게까지 주물러 드리곤 한다.
나머지 3남매 중 개인택시를 하는 둘째 오빠가 두세 달에 한 번씩 다녀가고 큰오빠와 언니는
일 년에 한번 코빼기를 볼지 말지이다.
어쩌다 아버지 제삿날 넷이 모이면 큰오빠와 언니는 서로 자랑하기 바쁘다 차를 큰 차로 바꿨다느니,
아파트 평수가 몇 평이라느니, 아이들 유학준비가 어떻다느니 한사람이 하면 또 다른 사람이 이어
연신 자랑을 하는데 작은오빠와 정자는 자랑거리가 없어 끼어들 엄두도 못 내었다.
오빠가 내려와서 돌아갈 때 엄마에게 돈 10만 원을 손에 쥐어주면 엄마는 좋아서 그 돈을
어금니 아끼듯 조금씩 쓰는데 동네사람들에게는 큰아들이 몇 십 만원을 주고 갔다고 자랑을 했다.
언니도 마찬가지다 엄마 용돈을 조금 내어 놓고는 달래서 차에 실고 가는 것은 몇 배이다.
엄마가 편찮으셔서 약값이 제법 쏠쏠히 들어가는데 정자네 형편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오빠나 언니한테 전화라도 하면 마지못해 10만 원 정도 보내면서 생색은 어찌나 내는지
그 꼴 보기 싫어 정자는 돈 보내달란 소리를 안 하고 있다.
어머니가 80 이 되어가니 망령기가 조금씩 보였다.
식사를 금방 드시고 밥 안준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밖에서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딸 정자 흉을 어찌나 보는지 밥도 굶긴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착한 줄 알았던 정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오빠와 언니도 와서는 엄마가 소곤소곤 이르는 말을 듣고 너무 진실 되고 그럴듯하게 말씀 하시니
정자를 나쁘게 보고 있다.
작은 오빠만은 사실을 안다.
휴가 때 3일을 엄마와 재내보고는 머리를 썰썰 내둘렀었다.
그러면서 정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말이라도 따뜻하게 하고 전화라도 자주하고 있다.
엄마의 병세가 점점 깊어지고 이제는 한사람이 곁에 붙어있어 간호해야 되는데,
농촌에서 일손이 바쁜 정자로서는 여간 고충이 아니었다.
다행히 방학 때나 공휴일에는 직장 다니는 아들딸이 집에 와서 엄마의 일손을 적극 돕는다.
다른 아들딸도 더럽다고 욕기기를 버럭 내며 한번쯤 하다 그만둔 오줌똥 받아내는 일을
군말 않고 잘도 하며 할머니 목욕도 자주 시켜드리고 있다.
그러나 큰오빠 아이들이나 언니네 아이들이 어쩌다 한번 올 때면 노인네 냄새 난다며
할머니 방엔 얼씬도 안한다.
작은 오빠는 혼자 고생고생 하는 정자가 안타까워 형과 정옥이 한태 얼마씩이라도 모아 송금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그래야지 하면서도 고작 몇 십 만원 한번 보내고 말았다.
작은 오빠는 그래도 어려운 살림에 매달 10만 원식 보내주고 있다.
그런데 올 봄 엄마가 갑자기 쇠약해 지셨다.
식사도 잘 못 넘기고 죽을 쑤어 떠 넣어드려도 힘들어 하신다.
정자는 오빠에게 어머니 위중함을 알리고 서울 병원에라도 모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상의했지만,
오빠는 태연히 “어머니 올해 몇이시지?”
“오빠는 엄마 연세도 오르시오? 여든 다섯이요”
“그래? 그렇게 나이 많은 분들은 병원에서도 잘 안 받아 한마디로 꺼리지,
그러니 네가 잘 공양좀 해드려 내가 돈 좀 보낼게”
언니도 역시 약속했는지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각 10만원씩 보내왔다.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져 죽도 못 넘기신다, 정자가 콩을 삶아 갈아서 숟갈로 떠 먹여드리니
몇 번은 넘기셨지만 이제 그것도 못 넘기신다.
그러다 새벽에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눈을 뜨고 정자를 한동안 바라보시더니 운명하신 것이다.
정자는 어머니를 부르며 한동안 애통해 했다.
그러다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는 그래 알았다 곧 내려가마. 하고 끊었다.
날이 새자 정자 남편은 장모님 장례를 집에서 치르기가 초협하니 읍내 장례식장에 모시자고 말했다.
정자는 그래도 맏 상주인 오빠와 상의해야 한다며 전화를 하니
오빠는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운구차를 보냈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야 한다고 강력히 말한다.
장남이 그러니 딸이 무슨 권한으로 반대하겠는가?
아침밥을 대충 먹고 조금 있으니 차 꼭대기에 불을 번쩍거리며 앰뷸런스한대사가 정자집으로 들어선다.
장정둘이 내리더니 시신이 어디 계시냐며 물어 흰 천으로 어머니시신을 싸더니 차에 싣고는
윙윙거리며 떠나버린다.
정자와 정자 남편은 그 사람들이 건네는 병원 명함 한 장을 받고는 멍하니 서있었다.
“여보 우리도 서울로 가야 하는 것 맞죠?”
“그래야지”
가방에 주섬주섬 필요한 도구를 챙겨 넣고 서울 가는 버스에 올랐다.
둘은 길을 잘 모르니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잡은 다음 기사에게 명함을 보여 주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병원은 엄청 컸다 어디가 어딘지 길 잃어먹기 십상이었다.
물어물어 엄마가 계신 빈소를 찾았다.
언제 구했는지 어머니 젊었을 때 사진이 수많은 국화에 쌓여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메 우리 어머니 출세하셨네, 살아생전 구경 한번 못하던 큰 병원에 돌아가셔서 찾아 오셨네,
정자는 영정 앞에서 통곡을 한다.
한참을 울다가 옆을 보니 아무도 없다 오빠를 찾으니 상주 방에 있단다.
정자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빠는 모르는 몇 사람에 둘러싸여 누구는 연락했어? 누구는 했는가? 바빠서 눈길한번 안 주고.
말도 못 붙이게 바빠 보인다.
모르는 사람들은 회사 직원들이라 했다.
오빠는 저녁때 까지 안 나오고 그 일을 하고 있다.
언니와 형부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역시 그 일들을 하고 있었다.
간간이 오시는 손님은 작은 오빠가 맞고 있다.
장례를 치루는 3일 동안 내내 빈소를 지키는 사람은 정자 내외와 작은 오빠 뿐 큰오빠는 손님 접대 하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어머니 돌아가신 것이 무슨 축제인줄 아시나보다.
정자는 변변히 먹지도 못하고 거의 빈소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정자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어머니를 땅속에 묻는다 생각하니 간장이 녹는 듯 슬프다.
밤이 이슥해서 그런지 그 많던 문상객이 뜸하다.
오빠가 상주 방에서 찾는 단다.
정자뿐아니라 작은오빠 내외 언니와 형부내외 모두 여덟 사람이 모여 앉았다.
큰오빠가 말했다 이제 내일새벽 출상인데 지금 부의금 상자를 열어 각자 나누자.
그리고 장례비용은 4남매 공편하게 똑같이 부담하기로 하자.
이 말이 떨어지자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데 작은오빠가 나서서 한마디 한다.
그동안 엄마를 정자 혼자서 모셨고 또 4남매 중에 형편도 어려우니 정자는 제외시키고 셋이 부담하기로 합시다.
그때 큰오빠네 올케가 나서더니 아가씨라고 어머니가 똥 기저귀 한번 덜 빨았겠어요? 넷이 나눠야 합리적이죠.
작은 오빠가 성질을 부린다, 해도 해도 너무 들 하시네,
이게 무슨 형제에요?
서로 돕는 게 형제지.
그때 정자가 나섰다 ,
작은오빠 목소리 줄여요, 언니 말씀이 백번 맞아요, 우리도 낼게요,
그때 정자 남편이 불편한 심정으로 말한다,
걱정 말아요 빗이라도 얻어서 낼 태니,
큰오빠가 다시 나섰다.
그럼 부의함을 옮기자 .
여럿이 부의함을 들어 방 한복판에 거꾸로 쏟았다.
차곡차곡 쌓였던 수많은 봉투들이 와르르 쏟아져 산처럼 쌓인다.
다시 큰오빠가 말한다.
여기서 자기와 연관이 있는 봉투를 각자 챙겨라.
큰오빠와 올케는 눈에 불을 켜고 아는 회사 아는 이름을 찾기에 바쁘다.
작은 오빠는 간간이 나오는 봉투를 모아 놓는다.
정자는 찾을 생각도 않고 찾아봐야 나올 봉투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구경만하고 있다.
언니내외도 열심히 뒤적이며 찾고 있었다.
큰오빠 뒤로 봉투가 엄청 쌓인다. 언제 준비했는지 언니는 노랑 고무줄로 봉투를 연신 묶어낸다.
한 시간 여를 그러고 나니 이제 바닥에 20여개의 봉투만 남았다
이것은 시골마을에서 다녀간 사람들의 부의금이었다.
큰오빠가 또 나섰다 이것은 시골 에서온 문상객의 부조금이니 정자 몫으로 하자.
시골에서 서울까지 온 분들은 성의가 너무 고맙지만, 봉투에는 과연 몇 푼이나 들었겠는가?
정자 남편이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아들딸을 불러놓고,
너희들 통장에 얼마나 있니 한 오백 맞춰서 가져와야겠다.
둘은 예! 대답하고 물러난다.
작은 오빠는 정자를 보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를 반복한다.
오빠는, 왜 미안해, 그런 말 말아요, 우리도 이제 아이들 취직해서 살만해요.
다음날 새벽, 서울로 잠시 나들이 온 정자 모친은 다시 시골선산을 향해 출발했다.
장사지낸 3일내내 빈소한번 안 지키고 부의금만 한몫 챙기려고 눈에 불을 켠 큰 오빠는
끝내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다. 언니도 큰오빠와 별 다를 게 없다.
눈이 퉁퉁 붓게 울은 것은 정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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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말)
이제 일편이지만 돈이 굴러가는 사건현장에서 한편한편 쓸 계획이다 .
이 내용은 거의 사실에 입각해 쓴 것이다 ,
정자라는 가상의 주인공은 등장시켰지만,
시골에서 죽은 부모를 서울로 데려와 장사 치른 사건은
주위에서 들었고,
장례식장에서 부의함 뒤집어 챙긴 사건은 장례식장을 경영하는
친구한테 직접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