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글이라고/문학의 언저리(수필)

영화구경

hobakking 2019. 4. 15. 10:18

청명한 개천절 날,

여느 때 같으면 산으로 달려갔을 텐데 지난 토요일 강행군 때문에 안 좋던 발목이 시큰거린다.

멀쩡한 날씨가 아깝다.

심심해 전철 두 정거장 타고 상암 CGV 극장에 갔다.

달포 전에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오늘은 밀정을 골랐다.

나도 문화 혜택을 누려 집에서 음식 고르듯 영화 제목을 골라 콕 집어 선택하고 출력까지 마치니

이 얼마나 편한가.

가면서 예날 생각이 불쑥 났다.

나의 고향은 시골에서도 깡촌, 면소재지 갈려도 10여분 걸어가야 하는 오지마을이다.

영화라야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나 오는 가설극장 영화가 전부였다.

영화 상영 5일전부터 면소재지에는 포스터가 붙여지지만 촌사람들은 포스터 볼 시간조차 없고

막상 상영하는 날 주최 측에서 확성기를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실고 동네 어귀까지 와서는

처음 삑삑거리며 볼륨 조절을 하고는 마이크를 후후 몇 번을 분 다음 아아 {마이크 실험 중} {마이크 실험 중}

이라 두어 번 한 후,

{문화와 예술을 아낌없이 사랑하시는 시초면민 여러분(시초는 우리 고향 면이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문산 시장에 임시 가설한 영화 이동선전반입니다.

오늘밤 7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최 무룡과 이민자주연 피리 부는 모녀고개

아 ! 이다지도 기구한 삶이 있더란 말인가?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피리 부는 모녀고개를 7시부터 상영할 예정이오니

면민 여러분들께서는 저녁식사 일찍 마치시고 손에 손을 잡고 문산 시장까지 오셔서

만장의 성황을 이뤄주시면 대단히 감사 하겠습니다}

이 말을 두 번 반복한 후에 다른 동네로 이동하곤 하였다.

궁금해서 형들은 형들 친구하고 누나는 누나 친구하고 삼삼오오 가설극장으로 모여든다.

이때 짓궂은 형들은 기도 눈을 피해 천막을 들추고 개구멍으로 들어가 공짜 영화도 보고,

들키는 날엔 치도곤을 당하기도 하며 나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돈을 내고 들어가곤 하였다.

보통 영화를 3일 동안 하는데 시작하기에 앞서 내일 하고 모레 상영할 영화 예고편을 꼭 한다.

화면은 얼마나 틀어댔는지 필름이 닳아서 비가 오는 것처럼 화면이 안 좋았다.

또 상영 중 한 두 번씩 필름이 끊어지면 김이 팍 새버려 휘파람과 야유 소리가 진동하곤 하였다.

또 이 날은 시골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게 모이고 있었기에 타동네청년과 우리 동네 처녀사이에

연애가 이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다음날 친구들끼리 모이면 전날 밤 본 영화이야기가 종일토록 화제였었다.

지금은 시골에도 이동가설극장이 없어진지 오래 되었고 영화 좋아하는 사람은 차타고 시내에 가서 관람한다.

그 예날 우리는 영화구경이라는 말 대신 극장구경이라 했었다.

극장구경은 영화를 보지 않고서도 극장 안을 휘 둘러보아도 극장구경이라 할 만한데,

영화 볼 땐 팝콘을 먹어야 제격인데 혼자 보면서 그럴 수도 없고 나이 먹은 사람이 그런 사람도 없고,

혼자 가만히 앉아보고 조용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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